최근 주요 그룹사에서 여성 오너 후계자의 경영 참여가 눈에 띄게 늘고 있다. 과거에는 단순한 ‘지분 보유자’에 머물렀던 여성 후계자들이 이제는 실질적 경영 역할을 맡으며 조직의 핵심 전략을 이끌고 있다. 이들은 각자 그룹 내 주요 사업을 전담하며 남성 오너와는 분업의 형태로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남녀 역할 구분이 아닌 실적 기반의 경영 승계가 새로운 형태로 자리 잡는 과정이기도 하다. <IB토마토>는 여성 후계자들의 등장이 기업 경영에 미치는 변화와 함께 남매경영의 협력과 갈등 요인, 그리고 미래 경영 모델로의 전환 가능성을 짚어보고자 한다.(편집자주)
[IB토마토 김규리 기자] 국내 재계에서 여성 오너 후계자들이 주요 계열사 경영 전면에 나서며 분업 경영이 본격화되고 있다. 과거 상징적 역할에 머물던 여성 후계자들이 지분 승계와 함께 실질 경영권을 확보하며 독립 사업부문을 책임지는 사례가 확산되는 추세다. 신세계·CJ그룹 등에서 나타난 남매 경영 구조는 경영권 안정과 각자 사업 전문성 강화를 동시에 노리는 승부수로 평가된다. 특히 ESG 확산과 다양성 중시라는 사회적 변화도 이러한 흐름에 힘을 보태는 추세다. 결국 여성 후계자의 경영 참여 확대는 국내 재계에서 ‘유리천장’이 깨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남매경영이 새로운 오너 경영의 모습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전면에 등장한 여성 후계자들…분업의 승부수
13일 재계에 따르면 신세계그룹은 지난해
이마트(139480) 부문을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이 맡고 백화점 부문은 정유경 ㈜
신세계(004170) 회장이 경영하는 계열 분리를 공식화하면서 본격적인 남매 경영에 속도를 내고 있다. 같은 해 3월과 10월 정용진 회장과 정유경 회장이 각각 신세계그룹, ㈜신세계 회장으로 승진하면서 본격적인 남매 분리 경영에 닻을 올렸다.
이어 지난 4월30일에는 이명희 신세계그룹 총괄회장이 ㈜신세계 지분 전량(10.21%)을 딸 정유경 회장에게 증여했다. 이에 따라 정유경 회장의 지분율은 기존 18.95%(182만7521주)에서 29.15%(281만2039주)로 높아지며 그룹 경영권을 안정적으로 확보했다. 이명희 총괄회장이 보유했던 그룹 지분을 모두 정리하면서 승계 작업이 사실상 마무리됐다는 평가다.
앞서 지난 2월 정용진 회장은 이명희 총괄회장이 보유하던 ㈜이마트 보통주 전량 278만7582주(지분율 10.0%)를 20% 할증 매입해 지분율을 기존 18.56%에서 28.56%로 높였다. 올 상반기 동안 이뤄진 남매 간 지분 정리로 양측은 각자 사업 부문에서 최대주주 지위를 확보하며 독자적인 경영 체제를 구축했다.
신세계 측은 <IB토마토>와의 통화에서 “각 부문 독립경영과 책임경영을 공고히 하고자 증여를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정유경 회장은 최근 쇼핑채널 ‘비욘드신세계’와 프리미엄 여행 플랫폼 ‘비아신세계’를 공개하며 온라인 신사업을 신성장동력으로 내세웠다. 침체된 국내 유통환경을 정면 돌파하겠다는 의지다. 정용진 회장이 이마트를 중심으로 대형마트와 창고형 할인점 사업을 총괄하는 것과는 명확히 역할이 구분된다.
재계 한 관계자는 <IB토마토>와의 통화에서 “남매가 각자 영역에서 최대주주로서 책임 경영을 수행하는 구조는 경영권 안정과 사업 부문별 전문성 강화에 유리하다”며 “다만 독립 경영이 장기적으로 전략 불일치나 중복 투자 등 비효율을 초래하지 않도록 조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신세계그룹 외에도
CJ(001040)그룹 역시 전통적으로 남매 경영 체제를 이어가는 곳으로 꼽힌다. 이미 이재현 CJ 회장이 식품 사업에서 출발해 그룹 전체를 총괄하고 있고, 이미경 부회장이 콘텐츠 사업을 전담하는 역할을 맡으면서 각자의 영역에서 두각을 드러낸 바 있다. 뒤를 이어 이재현 회장 자녀들이 현재 그룹의 두 축인 식품과 콘텐츠 부문에 자리 잡으며 2대에 걸친 남매 경영을 보여줄 것으로 예상된다.
장남인 이선호
CJ제일제당(097950) 식품성장추진실장은 글로벌 식품사업 성장 전략 수립과 신사업 투자, 식물성 식품 등 신성장 동력 발굴을 담당하고 있다. 장녀인 이경후
CJ(001040)ENM 브랜드전략담당실장은 음악콘텐츠사업본부 최고창작책임자(CCO)를 겸하며 콘텐츠 부문을 총괄 중이다.
지분 보유와 실질적 경영 참여까지…여성 후계자 존재감 확대
과거에는 실질 경영은 남성에게 집중되고 보유 지분도 미미했다면 최근에는 여성 후계자가 주요 계열사를 실질적으로 경영하는 동시에 지분도 일정부분 승계받아 경영권을 확보했다는 점이 크게 다르다.
이재현 회장은 지주사인 CJ 지분 42.07%를 보유한 최대주주이고, 이미경 부회장은 지분이 없다. 반면 이선호 실장은 CJ 지분 3.2%, 이경후 실장은 1.47%를 보유하고 있어 비율에는 차이가 있지만 지분 상속이 양측 모두에 이뤄지고 있다. 게다가 이들은 CJ의 신형우선주(4우선주)를 각각 29.13%, 26.9% 보유하고 있다. 신형우선주는 발행 후 10년이 지나면 의결권이 있는 보통주로 전환할 수 있는 구조로 경영권 승계를 염두에 둔 지배지분 확보 수단으로 주로 활용된다. 발행 당시에는 의결권이 없어 지배구조 개입 부담이 적지만 전환 시점 이후에는 지분율이 실질 경영권에 직결돼 장기적인 승계 전략의 핵심 수단이 될 수 있다.
정유경·정용진 남매 역시 각자 맡은 사업부문인 신세계와 이마트의 최대주주다. 경영권 분쟁을 방지하고 분업 구조를 가능하게 하는 기반이 되고 있는 셈이다.
이유정 법무법인 원 변호사는 <IB토마토>와의 통화에서 “과거에는 여성 후계자들이 기업의 지분은 갖고 있어도 경영 전면에는 나서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최근 문화·콘텐츠·유통·백화점 같이 소비자와 직접 맞닿아 있고, 감성과 트렌드가 중요한 분야에서 여성 오너들의 참여가 늘어나고 있다"면서 "여성 기업인들이 소비자의 감수성을 더욱 잘 이해하고 변화의 흐름을 유연하게 대응하면서 향후에도 다양한 산업에서 (여성 오너 후계) 경영 참여는 보편적인 흐름으로 자리 잡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규리 기자 kkr@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