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국내 사모펀드(PE) 시장은 대형 딜 가뭄을 겪었다. 인수·합병(M&A) 시장에선 대기업들의 사업 재편에 따른 비핵심 사업부 매각과 미드캡에 딜이 집중되어 있고, 1조원대 이상 딜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투자금 회수(엑시트) 불확실성이 커지자 리스크 대비 수익성이 더 확실한 곳으로 전략을 수정했다는 평가다. <IB토마토>는 올 한 해 나타난 PE 업계 지형 변화와 그 배경을 종합적으로 짚어보고자 한다.(편집자주)
[IB토마토 홍준표 기자] 국내 사모펀드(PEF) 시장에서 통매각을 통한 엑시트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고금리 기조가 장기화되며 인수금융 조달 여건이 급격히 악화된 데다, 규제 부담과 업황 불확실성까지 겹치면서 1조원 이상 대형 인수·합병(M&A)이 사실상 멈춰 섰기 때문이다. 이에 사모펀드들은 경영권 프리미엄을 전제로 한 통매각 대신 블록딜이나 컨티뉴에이션 펀드로 회수 전략을 수정하는 모습이다.
(사진=롯데카드)
'조 단위' 딜 줄줄이 좌초…예비입찰 단계서 멈춘 '통매각'
올해 국내 M&A 시장에서는 1조원 이상 대형 거래가 번번이 매각 논의 단계에서 표류 중이다. 롯데카드가 대표적이다. MBK파트너스는 롯데카드 재매각을 위해 기존에 고집했던 3조원대 몸값을 2조원대로 낮췄지만, 예비입찰서 참여 의사를 밝힌 원매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앞서 MBK파트너스는 2019년 롯데카드 지분 79.83%(한국리테일카드홀딩스 59.83%·우리은행 20.0%)를 1조3800억원에 인수했다. 이후 3년 만인 2022년에 매각을 첫 시도했지만, 몸값에 대한 원매자 측과의 눈높이 차이로 한 차례 무산된 바 있다. 그래도 당시엔
하나금융지주(086790)와 케이티(
KT(030200)) 등이 예비입찰에 참여했으나, 올해는 예비입찰 단계부터 원매자가 나타나지 않아 통매각이 더욱 어려워졌다는 평가다.
SK실트론의 경영권 매각도 올해 예비입찰 단계서 원매자를 찾는 데 실패했다. 매각 대상은
SK(003600)가 보유한 지분 51%와 총수익스와프(TRS) 계약으로 묶인 19.6%다. 전체 기업가치가 5조원으로 추산되는 가운데 실제 몸값은 2조~3조원으로 거론되고 있다. SK는 2017년 LG실트론(현 SK실트론) 지분 51%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TRS 계약을 통해 잔여 지분 중 19.6%는 SK, 29.4%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보유하는 방식의 거래 구조를 짰다.
매각의 가장 큰 걸림돌로 지적된 최 회장의 이혼소송이 올해 대법원서 파기환송되면서 재산분할 리스크는 일단락됐지만, 재무적투자자(FI)인 사모펀드들은 몸값이 너무 높다며 발을 빼는 분위기다.
SK실트론 인수를 위한 IMM프라이빗에쿼티와 스틱인베스트먼트의 컨소시엄은 무산됐고, MBK파트너스 역시 최근 불미스러운 일들이 겹치며 인수 의사를 사실상 접은 상황이다. SK의 전통적인 파트너 한앤컴퍼니 정도가 남아있지만, SK실트론 측에서 요구하는 몸값이 과도하다는 판단으로 우선은 시장 상황을 관망하고 있다. 전략적투자자(SI)인
두산(000150)그룹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지만, 실제 인수의향서(LOI)를 제출한 곳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이 외에도
F&F(383220)의 테일러메이드 인수는 우선매수권 보유에도 인수자금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JKL파트너스의
롯데손해보험(000400) 매각이나 카카오모빌리티 매각 무산 등 M&A 시장서 조 단위로 거론되는 매물에 사모펀드들의 관심은 예년과 같지 않다는 평가다.
시간 벌기·부분 회수로 방향 틀어
펀드 만기가 다가오는 상황에서 회수를 미룰 수도 없는 만큼, 사모펀드들은 통매각을 고집하기보다 현실적인 대안을 찾는 쪽으로 전략을 수정하고 있다.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컨티뉴에이션 펀드다. 기존 펀드에서 보유하던 자산을 새로운 펀드로 넘겨 운용 기간을 연장하고, 기존 출자자(LP)에는 엑시트 기회를 제공하는 구조다. 컨티뉴에이션 펀드는 통매각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밸류에이션을 방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당장 시장가에 자산을 팔지 않아도 되고, 업황 회복이나 추가 가치 제고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는 대표적으로 JC파트너스의 법인보험대리점(GA) 굿리치에 대한 컨티뉴에이션 펀드 결성이 꼽힌다. 앞서 매각을 추진했지만, 시장에서 평가하는 몸값이 여의치 않자 경영권 유지를 택하고 투자 기간을 늘린 것이다.
다만 시장 일각에선 컨티뉴에이션 펀드 활용은 단순 만기 연장에 그칠 뿐만 아니라, 투자금 회수가 어려운 자산을 새로 담는 데 불과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상은 매물이 팔리지 않아 재고를 안고 펀드만 갈아탄다는 것이다. 실제로 운용사 입장에선 컨티뉴에이션 펀드 활용 시 신규 LP 설득과 공정성 논란을 동시에 관리해야 한다는 부담을 지게 된다.
IB 업계 관계자는 <IB토마토>에 “해외에선 컨티뉴에이션 펀드를 통한 회수 전략이 보편화되어 있지만, 국내에선 아직까지 이를 활용하는 사례가 많지 않다”며 “GP와 LP 사이에 투자 자산에 대한 가치 책정이나 성공보수에 대한 이견이 불거질 수 있는 단점을 극복하면 중장기 관점에서 수익성을 재고하는 방식의 투자 전략으로 활용될 수 있고, 회수 시장 다변화라는 측면에서도 긍정적이다”라고 전했다.
일부 사모펀드들은 블록딜을 통한 단계적 회수 시장에도 눈을 돌리고 있다.
클래시스(214150) 경영권 매각을 추진 중인 베인캐피탈의 경우, 시가총액이 높아지면서 매각가에 대한 눈높이 차이로 인해 일부 지분을 묶어 파는 블록딜로 선회했다. 주당 매각가는 5만7915원으로, 블록딜 전날 종가 6만5000원 대비 10.9% 할인된 값에 총 2276억원을 회수했다.
블록딜은 상황에 따라 경영권 프리미엄을 전제로 한 통매각이 어렵다고 판단해 지분을 쪼개 파는 방식이다. 일부 지분을 프리미엄 없이 블록딜로 현금화하기 때문에 할인이 이뤄지지만, 대형 통매각이 쉽지 않은 상황서 단계적인 회수에 나서는 것이다.
일부 사모펀드들은 당초 경영권 프리미엄 없이 블록딜을 전제로 엑시트를 설계하기도 한다. 올해 맥쿼리자산운용의
LG씨엔에스(064400) 지분 블록딜, KKR의
HD현대마린솔루션(443060) 지분 매각이 대표적이다. 경영권 인수가 아닌 방식의 투자자로 참여해 기업 상장 이후 블록딜로 회수에 나선 방식이다.
사모펀드 업계 한 관계자는 <IB토마토>에 “사모펀드들이 통매각에 어려움을 겪는 사례가 많아지면서 회수 시장도 다변화될 것”이라며 “한 번에 경영권을 넘기는 엑시트 보다는 앞으로 자산 특성에 따라 회수 수단을 유연하게 조합하는 운용사가 경쟁력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홍준표 기자 junpyo@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