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벤처캐피탈(VC) 시장은 최근 몇 년간 뚜렷한 변곡점을 맞았다. 2021년까지 이어진 초저금리와 풍부한 유동성은 공격적인 투자 확대로 이어졌지만, 2023년 이후 금리 상승과 기업공개(IPO) 시장 침체가 겹치며 회수 환경이 급격히 악화됐다. 이에 VC들은 글로벌 펀드 플랫폼 구축과 세컨더리 펀드 결성 등 다양한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다. 특히 금융그룹 계열 VC들은 안정적인 출자금 확보와 금융 생태계 시너지를 바탕으로 대형 펀드 결성에 나서고 있다. 단기 실적은 악화됐지만 모기업의 자본력을 기반으로 중·장기 운용 전략을 펼치며 경기 불확실성에 대응하는 모습이다. <IB토마토>는 이 같은 흐름 속에서 금융그룹 계열 VC들의 현황과 전략을 짚어보고, 벤처투자 산업의 재편 방향을 가늠해보고자 한다.(편집자주)
[IB토마토 홍준표 기자] 금융지주사들이 벤처투자 시장에서 영향력을 빠르게 키우고 있다. KB·신한·하나·우리·NH 등 5대 금융그룹은 별도 VC 자회사를 통한 펀드 결성, 그룹 전략과 연계된 스타트업 투자에 속도를 내고 있다. 특히 금융지주들은 최근 금융당국의 ‘생산적 금융’으로의 전환에 발맞춰 벤처투자 부문을 강화하는 분위기다.
20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내년부터 은행 비상장 주식 보유와 관련해 위험가중자산(RWA) 규제를 400%에서 250%로 낮춰 부과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정부·지자체·정책금융기관의 보조나 투자를 받는 ‘정책목적 펀드’에는 RWA를 100%로 적용할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기로 했다.
(사진=금융위원회)
‘생산적 금융’ 발맞춰 우리·하나 등 벤처투자 강화 움직임
앞서 금융위원회는 150조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를 통해 늘어나는 첨단산업 투자 수요에 대응하는 한편, RWA 조정을 통해 은행권의 자금 흐름이 부동산에서 벤처기업으로 바뀌는 생산적 금융으로의 전환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국민성장펀드를 통해 AI(30조원), 반도체(20.9조원), 모빌리티(15.4조원) 바이오·백신(11.6조원) 이차전지(7.9조원) 등 미래산업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는 구상이다.
RWA는 주식 등에 대해 위험가중치를 부여하는 규제다. 2023년 바젤Ⅲ 규제가 전면 도입되면서 적용되기 시작했다. 케이스별로 비상장주식을 포함한 주식 투자에 250~400%의 위험가중치가 부여되지만, 실질적으로는 ‘RWA 400%’ 적용이 원칙이다. 이 때문에 2020년을 전후해 국내 주요 금융그룹이 VC 계열사를 확보했지만, 투자 규모가 늘어나는 데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금융당국의 ‘생산적 금융’에 발맞춰 금융지주사들이 기존 VC 계열사를 활용해 모험자본 투자를 빠르게 확대하려는 움직임이다.
금융위의 국민성장펀드 조성에 가장 먼저 반응한 곳은 우리금융그룹이다. 우리금융은 은행권 최초로 생산적 금융 대전환을 위한 청사진을 공개했다. 국민성장펀드에 10조원을 투자하고, 자체적으로 7조원을 투자한다는 계획이다. 자체 투자금 7조원은 우리PE자산운용, 우리벤처파트너스 등이 생산적 금융 펀드를 조성해 모험자본에 투자한다는 것이다. 지주 산하에 임종룡
우리금융지주(316140) 회장 직속으로 ‘첨단전략산업금융협의회’도 신설, 미래산업에 대한 투자를 직접 챙기겠다고도 밝혔다.
이 외에도 하나금융그룹은 ‘경제성장전략 TF’를 신설하고 VC 자회사인 하나벤처스와 벤처투자 연계를 강화하기로 했으며, 지역 금융을 기반으로 하는 BNK금융그룹도 IPO·SPAC 지원 및 지역 혁신기업 펀드를 통한 실물경제 지원책을 잇따라 내놓았다.
VC 투자 활력 기대감…제도 개선 난관 '여전'
관련 업계에선 자금 시장 불확실성이 확대되는 가운데 금융계열 VC가 안정적인 자금공급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라는 시선이다. 국내 4대 금융지주가 올 상반기에만 10조3244억원의 순이익을 거둔 가운데 그간 미미했던 벤처투자 규모가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내 4대 금융지주의 VC 계열사들의 지난해 전체 투자 집행 규모는 8454억원이며, 올해는 8월까지 집행한 투자금액은 총 4941억원에 그친다.
국내 VC가 스타트업에 투자한 금액은 최근 몇 년간 감소하는 추세였다. 더브이씨에 따르면 국내 벤처캐피탈이 스타트업에 투자한 금액은 2021년 17조9000억원, 2022년 15조3000억원, 2023년 7조6000억원, 지난해에는 6조800억원대로 급감했다. 비상장사 주식에 대한 ‘RWA 400%’ 규제가 일부 완화된다면 이 같은 감소 추세가 반등할 수 있다고 업계는 기대한다.
다만 일부 규제 완화에도 불안감은 남아있다. 금융당국은 앞서 단기매매 목적으로 투자된 비상장 주식이나 업력 5년 미만 기업에 한정해서만 400%를 적용하겠다고 밝혔지만, 실제 적용은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VC 투자에는 통상 블라인드 펀드가 주로 활용된다. 상장사와 비상장사, 특히 비상장 초기기업에 대한 투자가 섞인 경우엔 기준이 모호해질 수 있다.
이 외에도 일각에선 금산분리 제도 또한 민간 시장 활성화를 가로막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행 제도는 기업형 벤처캐피탈(CVC)의 외부출자를 40%, 해외투자를 총자산의 20% 이내로 제한하고 있어 민간 시장에서의 자금 수혈을 가로막고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실제로 작년 일반지주회사 167개 중 14개사만이 총 2451억원을 투자해 전체 벤처투자(10.9조원)의 2.2%에 그치는 등 활용이 미미한 실정이었다. 일반 지주회사의 CVC 투자규제를 완화하기 위해선 공정거래법을 비롯해 은행법, 보험업법 등 금산분리와 관련된 개정이 뒤따라야 한다.
VC 업계 관계자는 <IB토마토>에 “VC 투자는 대부분 블라인드 펀드인데, 상장·비상장·업력 기준을 섞어 RWA를 차등 적용하는 건 현실적으로 기준을 명확하게 두기가 어렵다”며 “RWA 100% 특례를 정책목적 펀드에만 적용하는 것도 민간 시장의 투자 자율성을 해칠 수 있어 신중히 설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홍준표 기자 junpyo@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