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과 주요 그룹 총수 간 면담 이후 삼성·SK·현대차·LG 등 대기업들이 연달아 수백조 단위의 투자 계획과 대규모 채용안을 내놓고 있다. 외형 확장과 미래 전략 확보라는 명분이 깔려 있지만, 각 그룹의 실적과 재무여력에 비해 규모가 과도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본업의 견조한 현금 창출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투자와 채용은 지속될 수 없다. 이에 <IB토마토>는 주요 그룹의 투자 능력과 본업 성과,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재원 마련 역량을 점검하고자 한다.(편집자주)
[IB토마토 김규리 기자] 정의선
현대차(005380)그룹 회장이 2030년까지 100조원이 넘는 초대형 국내 투자를 공개했지만, 자금 조달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관세 충격으로 수익성이 급락한 가운데 투자 규모가 예년보다 40% 이상 확대되면서 재원 마련의 현실성을 둘러싼 시장의 우려가 한층 짙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현대차그룹)
관세 타격에 영업활동 직격탄…현금흐름까지 악화
11일 재계에 따르면 현대자동차그룹은 2026년부터 2030년까지 5년간 국내에 125조2000억원을 투자한다고 지난달 발표했다. 직전 5년(2021~2025년) 투자액 89조1000억원보다 36조1000억원 증가한 금액으로 40% 이상 확대된 수준이다. 단순 계산으로 연평균 25조원 이상을 투자해야 하는 셈이다.
그룹은 인공지능(AI)과 SDV(소프트웨어정의차량) 및 로보틱스 등 신사업에 50조5000억원, 연구개발(R&D)에 38조5000억원, 경상투자에 36조2000억원을 투입할 계획이다. AI 데이터센터와 로봇 완성품 제조 공장, 서남권 수소 플랜트 등을 구축해 국내 산업 패러다임 전환을 선도한다는 구상이다. 동시에 울산 전기차 전용공장 준공과 화성 PBV 전용 거점 구축 등으로 국내 생산기지 위상도 강화할 예정이다.
문제는 이 같은 투자 계획을 뒷받침할 재무 여력이다. 그룹의 대규모 투자를 이끌 맏형 격인 현대차는 올해 미국발 관세 직격탄을 맞으며 수익 창출 능력이 급격히 위축됐다. 미국 정부가 4월부터 한국산 자동차에 25% 관세를 부과하면서 현대차는 2분기 이후 영업활동현금흐름(OCF)이 적자 전환했다.
1분기 2조원 수준이던 OCF는 2분기 마이너스(-) 1조433억원, 3분기 -4조8605억원으로 손실 폭이 더 커졌다. 이에 따라 올해 누적 금액은 -3조9008억원으로 전년 동기(-1조7304억원) 대비 악화 폭이 두 배 가까이 확대됐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현대차의 올해 예상 매출은 188조1245억원으로 전년 대비 소폭 증가하지만 영업이익은 12조6172억원으로 10% 감소할 전망이다. 이익 감소와 환율 효과까지 겹치며 현금을 벌어들이는 능력이 크게 둔화되는 상황이다.
유입 현금은 줄어드는 반면 투자액은 빠르게 누적되고 있다. 올해 초 관세 충격에 대응하기 위해 대규모 미국 현지 투자를 단행하며 오는 2028년까지 260억달러(약 38조원)를 투입하기로 한 데다 국내 투자까지 확대되면서 자금 유출 압박은 더욱 커졌다.
현대차그룹 측은 <IB토마토>에 “불확실성이 지속되는 상황이지만 선제적이고 적극적인 컨틴전시 플랜을 추진하고 있다”며 "재원 조달과 관련해서는 다각도로 방법을 고려하고 있다. 시장 환경에 따라 투자 계획은 유동적으로 운용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투자 확대는 계속되지만…SDV 사업 두고 논란
현대차그룹의 대규모 투자 드라이브가 본격화되면서 대상 사업에 논란도 동시에 커지고 있다. 특히 SDV와 자율주행 분야는 50조원이 넘는 투자가 예정돼 있지만 주요 성과가 부진한 상황이 이어지면서 시장의 우려가 짙어진 상황이다. 관세 충격과 수익성 하락으로 현금 창출력이 둔화된 시점이라는 점에서 향후 수년간 투자 재원을 어떻게 확보할지도 숙제로 남는다.
게다가 SDV 전환을 주도하던 송창현 사장이 갑작스럽게 사임하면서 투자 전략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도 안팎으로 나오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송 사장 또한 임직원 메일을 통해 “하드웨어 중심 산업에서 소프트웨어 DNA를 심고 차가 아닌 인공지능(AI) 디바이스를 만들겠다는 무모한 도전이 쉽지 않고 순탄치 않았다. 레거시 산업의 회사 사이에서 수없이 충돌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정 회장 역시 최근 “SDV와 관련해 저희가 다소 늦은 편이고 중국 업체나 테슬라가 앞서 있다”고 인정했다. 다만 “속도보다 안전이 우선”이라며 개발 방향을 조율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그룹 내부적으로도 기존 로드맵을 재검토하려는 흐름이 감지된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 같은 내부 기류 변화 속에서 50조원이 투입될 예정이었던 SDV·자율주행 신사업에도 일정 부분 제동이 걸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포티투닷과 모셔널 등 핵심 조직에서 성과 지연이 반복된 데다 누적 투자액이 이미 6조원을 넘긴 상황에서 그룹 안팎에서는 “무리한 투자”라는 지적이 재부상하고 있다.
관련업계 한 관계자는 <IB토마토>에 “실적 변동성이 큰 시기에 SDV 분야에 대한 공격적 투자 기조는 그룹 전체의 재무리스크로 이어질 수 있다”며 “현대차는 기술 개발 속도보다 투자 효율성을 먼저 점검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쌓이고 있다”고 말했다.
김규리 기자 kkr@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