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법 개정으로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이 기존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되면서 국내 대기업 이사회에도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과거에는 총수가 이사회 의장을 겸임하며 경영과 주요 의사결정을 직접 주도하는 구조가 일반적이었다면, 최근에는 총수와 이사회 의장을 분리해 견제와 감시 기능을 강화하려는 흐름이 확산되고 있다. 반면 일부 그룹은 여전히 총수 중심의 책임경영 체제를 유지하며 기존 지배구조를 이어가고 있다. 이에 <IB토마토>는 상법 개정 이후 달라지고 있는 총수와 이사회 간 권한 구조, 책임 범위, 그리고 새롭게 요구되는 이사회의 역할을 짚어보고자 한다.(편집자주)
[IB토마토 김규리 기자] 상법 개정으로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이 주주로 확대되면서 국내 주요 기업들의 이사회 책임 범위가 한층 강화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삼성전자는 총수가 이사회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이른바 '비등기' 지배 구조를 유지하면서 독자 모델을 고수 중이다. 핵심 경영 의사결정에는 총수 영향력이 유지되지만, 법적 책임은 이사회 구성원과 분리되는 구조라는 점에서 향후 책임경영 논란이 다시 부각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사진=삼성전자)
이재용 회장 미등기 유지…전문경영인·사외이사 중심 체제
14일 재계에 따르면 이재용
삼성전자(005930) 회장은 지난 2019년 등기임원 임기 종료 이후 현재까지 미등기 임원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삼성전자 이사회는 전영현 부회장과 노태문 사장 등 사내이사 3명과 사외이사 6명 등 총 9명으로 구성돼 있다. 삼성전자는 2018년 이사회 의장과 대표이사를 분리한 데 이어 2020년부터 사외이사를 이사회 의장으로 선임하며 경영진과 이사회를 분리하는 체제를 유지 중이다.
삼성전자 측은 <IB토마토>에 "2016년 3월 이사회 의장과 대표이사 지위를 분리하는 내용으로 정관과 이사회 규정을 개정했으며 2020년 3월부터는 이사회의 독립성과 투명성 제고를 위해 사외이사를 이사회 의장으로 선임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 회장은 공식적인 이사회 의사결정 구조에는 포함되지 않은 상태다. 현재 국내 4대 그룹 총수 중 미등기 임원은 이 회장이 유일하다. 그동안 사법 리스크로 인해 등기이사 복귀가 불투명했으나, 삼성전자가 반도체 호황을 업고 실적 고공행진을 이어가면서 이 회장의 경영 일선 복귀 가능성을 그룹 안팎에서 높게 점쳐왔다. 최태원
SK(003600)그룹 회장처럼 총수가 전략 방향을 직접 진두지휘하며 대규모 투자를 추진하고 신속한 의사결정을 이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재계 내부에서 꾸준히 제기돼 왔다.
상법 개정으로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이 주주 전체로 확대되면서 향후 유상증자와 합병 내부거래 자사주 정책 등 주요 안건에서 이사회 책임 부담은 한층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이 회장이 이사회 밖에 머무르면서 법적 책임은 등기이사와 이사회가 부담하는 구조를 유지하는 데 대해 시장 반응은 엇갈린다.
총수가 직접 이사회에 참여하지 않는 삼성식 비등기 체제가 오히려 리스크 관리 측면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해석이 있는 반면 책임경영 측면에서는 권한과 책임 간 괴리가 더 커질 수 있다는 지적도 지속된다. 실질적인 전략 방향과 투자 판단에는 총수의 의중이 반영되지만 법적 책임은 전문경영인과 이사회가 부담하는 구조가 고착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이 등기이사로 복귀하면 이사회 내 법적 책임을 직접 부담하게 된다. 이사 선임부터 이사회 결의에 이르기까지 공식 절차를 통해 경영 행위의 법적 주체로 편입된다는 의미다. 이 회장이 지속적으로 미등기 체제를 유지하는 배경에는 법적 책임 범위를 이사회 구성원과 분리하려는 구조적 계산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한 기업 경영 자문 변호사는 <IB토마토>에 "삼성전자의 비등기 지배 구조는 총수가 경영 전반에 영향을 미치면서도 이사회 법적 책임에서는 분리되는 이중 구조"라며 "상법 개정 이후 이사 개인의 주주 충실의무가 강화된 상황에서 이 구조는 오히려 이사회 구성원들에게 더 큰 법적 부담을 집중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권한과 책임의 분리…상법 개정 이후 더 커진 논란
재계에서는 상법 개정 이후 총수들의 등기임원 기피 현상이 더 확산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와 함께 감사위원 분리 선출과 3%룰 강화 다중대표소송제 논의 등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등기이사 부담 자체가 크게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책임경영 측면의 비판도 여전히 남아 있다. 이사회 구성원이 충실의무 이행의 직접적인 법적 주체가 되는 구조에서 실질적 영향력을 보유한 총수가 이사회 밖에 있을 경우 권한과 책임 간 괴리가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총수가 주요 경영 의사결정에 관여하면서도 법적 책임은 등기이사와 이사회가 부담하는 구조가 주주 이익 보호를 강화하려는 상법 개정 취지와 충돌할 수 있다는 의미다.
또한 이사회가 형식적인 의결 주체 역할을 맡더라도 실제 총수 영향력이 어느 범위까지 작동하는지 외부에서 검증하기 어렵다는 점 역시 논란의 여지로 남는다.
문성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는 <IB토마토>에 "일부 대기업 총수의 비등기 지배 구조는 경영 영향력과 법적 책임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논란의 소지가 있다"며 "향후에는 실질적 의사결정 영향력에 상응하는 책임 논의가 더욱 커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김규리 기자 kkr@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