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벨트의 한국인들)①장비는 미국으로…기술자는 비자 문턱에
미국 생산거점 확대…장비 설치 인력 파견도 증가
L-1 비자 요건 충족…중소 협력사 준비 부담 가중
숙소·의료보험 마련…파견 인력 정착 지원도 과제
공개 2026-10-13 06:00:00
이 기사는 2026년 10월 12일 06:00분 IB토마토 유료사이트에 노출된 기사입니다.
 
미국 남부가 한국 첨단산업의 새로운 생산거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텍사스주 오스틴·테일러에는 반도체 투자가 이어지고, 조지아주 서배너 일대에는 자동차·배터리 공장과 협력업체들이 모여들고 있다. 공장을 세우고 생산라인을 가동할 한국인 엔지니어와 기술 인력도 함께 향하지만, 투자 규모와 생산능력에 가려 이들의 생활과 노동환경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업무에 맞는 체류자격부터 주거와 의료, 체재비 부담까지 현장에서 풀어야 할 문제가 적지 않다. 사고나 비자 문제가 생겼을 때 대응할 여력이 부족한 중소 협력사와 파견근로자들의 사정은 더 어렵다. <IB토마토>는 미국 현장에서 생산기지를 움직이는 한국인들과 중소 협력사를 만났다. '테크벨트의 한국인들' 4부작을 통해 대기업의 해외 투자 이면을 들여다보고, 동반 진출을 뒷받침할 지원과 보호 장치를 짚는다.(편집자주)
 
※기사에 등장하는 일부 기업과 근로자는 신원 공개에 따른 불이익을 우려해 익명을 요청했습니다. 취재원 보호를 위해 해당 기업명과 개인 신원을 밝히지 않습니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지난해 3월 백악관 루스벨트룸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옆에 서서 대미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출처=연합뉴스)
 
[IB토마토 김규리 기자] 경기도 평택시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이곳에서는 다섯 번째 생산시설인 P5 건설이 진행되고 있다. 국내 생산시설을 세우고 장비를 설치해온 협력사와 기술 인력에게 새로운 일터는 미국으로도 넓어지고 있다. 대기업의 투자 발표 뒤에는 장비를 반입하고 생산라인을 가동하기 위해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 있다.
 
"앞으로 4년 동안 210억달러를 투자할 계획입니다. 현대차그룹이 미국에 투자하는 사상 최대 규모입니다."
 
지난해 3월24일(현지시간) 미국 백악관 루스벨트룸에서 정의선 현대차(005380)그룹 회장이 밝힌 투자 계획이다. 곁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제프 랜드리 루이지애나 주지사,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 스티브 스칼리스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 등 미국 정계 핵심 인사들이 자리했다. 국내 기업 총수가 미국 대통령과 함께 백악관에서 대규모 투자 계획을 공개하면서 현지 생산 확대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삼성전자(005930)도 미국 생산거점을 넓히고 있다. 텍사스주 테일러에 170억달러 이상을 투입해 첨단 파운드리 공장을 짓고 있다. 기존 오스틴 공장과 연구개발 시설 등을 포함한 텍사스 지역 투자 계획은 370억달러를 웃돈다.
 
투자금과 생산능력은 발표 자료에 담긴다. 하지만 공장을 실제로 움직일 사람들의 준비 상황은 숫자만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어떤 체류자격으로 현장에 들어갈지, 머물 곳과 의료보험은 어떻게 마련할지부터 풀어야 한다. 별도의 법무 조직과 인사 조직을 갖추기 어려운 중소 협력사에는 미국행 자체가 또 하나의 과제다.
 

경기도 평택시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5공장(P5) 건설 현장.(사진=김규리 기자)
 
국내 생산현장에서 미국으로, 장비 따라 움직이는 인력
 
삼성전자와 현대차그룹, LG에너지솔루션(373220), SK(003600)그룹, 한화(000880) 등 주요 기업은 미국에서 반도체·자동차·배터리·철강 생산시설을 늘리고 있다. 텍사스에서 앨라배마와 조지아로 이어지는 미국 남부는 이른바 '신(新) 남부 테크벨트'로 불리며 국내 기업의 새 생산거점으로 자리 잡았다.
 
현지 생산을 요구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압박에 관세 부담과 공급망 불확실성이 겹치면서 기업들의 투자도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공장 건물을 완성하는 것만으로 제품을 생산할 수는 없다. 장비를 들여와 설치하고 시험 가동을 거쳐 생산라인을 안정시켜야 한다. 국내에서 해당 장비와 공정을 다뤄온 협력사와 기술 인력이 미국으로 향하는 이유다.
 

경기도 평택시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앞.(사진=김규리 기자)
 
삼성전자는 지난 6월 테일러 공장 가동을 준비할 주재원을 대거 파견한 데 이어 추가 인력을 보내고 있다. 현지 주재원은 100여명으로 알려졌다. 장비 설치 등을 맡는 파견 인력과 협력사 직원까지 더하면 한국에서 테일러 현장으로 이동하는 인력은 수백명 규모로 추산된다. 공장 건설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수록 국내에서 해당 장비와 공정을 다뤄온 사람들의 역할도 커진다.
 
현대차그룹의 미국 생산 확대 역시 국내 협력사와 맞물려 있다. 그룹은 조지아주 자동차 생산시설을 중심으로 부품·물류·철강 분야까지 현지 공급망을 넓히고 있다.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의 연간 생산능력을 30만대에서 50만대로 확대하고, 루이지애나주에는 연산 270만톤 규모의 전기로 제철소를 건설할 계획이다. 지난해 발표한 투자 계획 중 부품·물류·철강 분야에 배정한 금액은 약 60억달러다. 조지아 공장의 생산량을 늘리려면 부품 공급시설과 인력을 함께 확보해야 하고 제철소 건설에는 또 다른 분야의 설비업체와 기술자가 필요하다. 대미 투자의 속도는 단순 숫자에 그치지 않는다. 기업의 미국 투자와 국내 공급망은 함께 움직이고 있다.
 

현대제철 당진제철소 현장.(사진=김규리 기자)
 
도원빈 한국무역협회 수석연구원은 <IB토마토>와의 인터뷰에서 "2023년 우리나라 해외직접투자(ODI)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43.7%, 올 1분기에는 46%대로 1988년 이후 최고치를 매년 기록 중"이라며 "한국의 대미 투자는 양국 모두에게 긍정적인 경제적 효과를 가져온다. 트럼프 관세로 인해 일시적으로 수출이 위축됐던 2025년을 제외하면 대미 수출이 본격화된 2017년부터 꾸준히 우상향하고 있고, 실제 과거(2024년) 실증분석 결과 한국의 대미 해외직접투자가 10% 상승하면 우리 수출은 약 0.202% 상승했다. 결국 대미투자가 수출을 유발하는 구조적인 현상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도 수석연구원은 미국 공장 신축에 필요한 자재와 기계·장비, 생산용 중간재를 국내에서 조달하는 점을 그 배경으로 짚었다. 국내에서 만든 장비가 미국으로 건너가면 이를 설치하고 시험 가동할 기술 인력도 뒤따른다. 실제로 미국 내 한국 현지법인이 전체 매입 가운데 한국에서 조달하는 비중은 61.4%(2024년 기준)로 세계 평균 기준치(43.4%)를 크게 웃돈다. 미국 진출에 따른 국내 수출 유발 효과가 타 국가 대비 크다는 얘기다.
 
투자 따라 미국행, 비자 문턱에 막힌 중소 협력사
 
"지난해 대규모 구금 사태 이후 미국 파견에 선뜻 지원하는 직원이 눈에 띄게 줄었다."
 
익명을 요청한 자동차 배터리 부품업체의 한 파견 직원은 <IB토마토>에 현장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수백억달러 규모의 투자 계획과 별개로, 현장에 투입될 직원들에게는 자신의 체류자격으로 맡은 일을 할 수 있는지가 당장의 문제다.
 
지난해 9월4일 미국 조지아주에서 벌어진 이민당국의 단속은 이러한 불안을 드러냈다.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 등은 현대차그룹과 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이 있는 조지아주 브라이언카운티에서 합동 단속을 벌였다. ICE가 발표한 전체 구금 인원은 475명이다. 외교부에 따르면 이 가운데 한국인은 317명이었다. 공장 완공을 위해 현장에 투입된 인력들이 구금되면서 이들이 보유한 체류 자격으로 실제 맡은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지가 쟁점으로 떠올랐다.
 

미국 이민당국이 공개한 조지아주 현대차 공장 이민 단속 현장.(출처=연합뉴스)
 
기업들은 단기간 직원을 미국에 보낼 때 단기 상용 B-1 비자나 전자여행허가(ESTA)를 통한 무비자 입국을 활용해왔다. 한국에서 만든 장비를 미국 공장에 들여와 설치하거나 현지 직원에게 운용법을 가르쳐야 했기 때문이다. 다만 같은 공장 안에서도 장비 설치와 시험 가동, 건설 작업의 경계는 분명하지 않을 수 있다. 미국 국무부 지침상 해외에서 구매한 산업 장비의 설치·보수에는 계약 내용과 파견 직원의 전문 지식 등 요건이 다르고, 직접적인 건축·건설 작업은 허용 범위에 들어가지 않는다. 기업이 직원을 보내기 전에 확인한 업무와 현장에서 실제로 맡게 되는 일이 일치해야 하는 이유다.
 
미국 국무부의 외교업무매뉴얼(FAM)에 따르면 해외 기업에서 구매한 산업용 장비의 설치·수리·보수나 이를 담당할 현지 직원의 교육은 일정 요건을 충족하면 B-1 체류자격으로 수행할 수 있다. 장비 판매 계약에 관련 업무가 포함돼 있어야 하고 파견 직원에게 필요한 전문 지식이 있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건설 현장 근로자를 감독하거나 교육하는 업무는 가능할 수 있지만 직접 건축·건설 작업에 참여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같은 공장 안에서 이뤄지는 업무라도 실제 수행 내용에 따라 체류자격 적합성이 달라지는 셈이다.
 

미국 이민단속 당국(ICE)이 홈페이지에 공개한 조지아주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출처=ICE)
 
단속의 여파는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에게만 머물지 않았다. 미국에서 작업을 이어가야 하는 파견 직원들은 자신의 업무가 체류자격의 허용 범위에 들어가는지 다시 확인해야 했다. 현지 파견을 앞둔 기업들은 적절한 취업 비자를 발급받기 위한 비용과 시간을 추가로 써야 했다. 이로 인해 파견 일정이 미뤄지면서 장비 설치와 시험 가동 일정에도 영향이 미친다는 게 업계의 하소연이다.
 
장기 파견에 활용되는 L-1 주재원 비자도 모든 기술 인력에게 열려 있는 선택지는 아니다. 미국 이민국에 따르면 한국의 파견 기업과 미국의 근무 기업 사이에 본사·지사·자회사·계열사 등 적격 관계가 있어야 한다. 또 일정 규모의 현지 투자도 선행돼야 하는 암묵적인 조건도 걸려 있다.
 
파견 대상자는 원칙적으로 신청 전 3년 중 해외의 해당 기업에서 1년 이상 연속 근무한 이력이 필요하다. 미국에서 맡을 직무 역시 관리자·임원에 해당하는 L-1A 또는 기업의 전문 지식이 필요한 L-1B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미국 법인과 관계가 없는 협력사 직원을 원청기업이 필요에 따라 곧바로 L-1 주재원으로 파견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출처=미국 국무부 외교업무매뉴얼)
 
기업들의 비자 신청을 지원하는 한 업체 관계자는 <IB토마토>에 "최근 주재원 비자 심사 과정에서 현지 사업 운영과 직원의 담당 업무를 확인하기 위한 보충 서류를 요구받는 사례가 늘고 있다"며 "미국 내 사업 규모와 인력 구성에 비해 한국에서 파견하는 직원이 많다면 해당 인력이 왜 필요한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특히 주재원 비자(L1, E2 등)의 경우 현지 법인이 있어야 하는 조건뿐 아니라 업종에 따라 30만~40만달러 수준의 투자 내역과 현지 인력·사업 운영 실태 등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에 중소업체의 경우 단기 파견 비자 발급이 더 활발한 것이 현실”이라고 덧붙였다.
 
현지 사업 운영과 파견 필요성을 설명할 자료를 준비하는 일도 중소 협력사에는 부담이다. 비자 준비에 시간이 걸리면 갑작스러운 장비 이상이나 공정 문제에 대응할 인력을 제때 보내기 어렵다. 출국 일정뿐 아니라 현장에서 맡길 업무까지 사전에 관리해야 한다.
 
앞서 만난 배터리 부품업체 직원은 "대기업과 달리 중소 협력사는 주재원 비자를 준비할 조직과 여력이 부족해 여전히 단기 출장비자(ESTA)에 의존하는 경우가 있다"고 전했다. 미국 현장에서는 국내 기술 인력이 필요하지만, 이들을 적절한 체류자격으로 보내기 위한 준비는 개별 협력사의 몫으로 남아 있는 셈이다.
 
비자를 받아 출국하더라도 준비는 끝나지 않는다. 파견 기간에 머물 숙소와 의료보험을 마련하고, 업무 중 사고나 체류 문제가 생겼을 때 원청과 협력사가 어떻게 대응할지도 정해야 한다. 별도의 법무·인사 조직을 갖추기 어려운 중소 협력사는 이런 준비를 맡을 인력부터 부족하다.
 
파견 직원들은 현지 생활에서도 어려움을 겪는다. 미국 내 신용이력이 부족해 주택 임차나 금융서비스 이용에 제약을 받고, 높은 물가와 의료비도 부담해야 한다. 한국과의 시차로 근무시간이 길어지면서 초과근무 수당 문제가 불거지기도 한다. 가족을 동반한 경우에는 가족의 생활 기반까지 마련해야 해 정착 부담이 더 커진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평택=김규리 기자 kkr@etomato.com
 
제보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