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토마토 송혜림 기자] 한국거래소가 법원 판단에 따라 관리종목 지정과 상장폐지를 유예할 수 있는 근거를 명문화했다. 시가총액 미달에 따른 상장폐지 결정에 법원이 제동을 걸자 시행세칙을 개정했지만, 법원이 문제 삼은 기준의 조기 적용과 회복 요건, 기업의 소명 기회 등은 그대로 남았다. 부실기업 신속 퇴출이라는 제도 목적과 기업의 절차적 권리를 함께 확보하는 것이 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사진=한국거래소)
상장폐지·관리종목 지정 '유예' 명문화
6일 한국거래소(KRX) 법무 포털에 따르면 한국거래소는 지난 2일 유가증권·코스닥시장 상장규정 시행세칙을 같은 날 동시에 개정했다. 개정 조항은 관리종목 지정 및 상장폐지 사유 적용 유예와 관련된 내용이 골자다.
유가증권시장은 제46조 제3항을 신설하고 관리종목 지정 효력에 관해 법원의 결정·판결이 있는 경우 거래소가 상장 관리에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 해당 규정에 따른 관리종목 지정을 유예하거나 효력을 정지하는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어 제48조 제14항에선 상장폐지 효력에 대해서도 동일한 법원의 결정이 있으면 상장폐지를 유예하겠다는 내용을 실었다. 코스닥시장도 같은 취지로 제58조 제3항과 제59조 제5항이 신설됐다.
이번 상장규정 시행세칙 개정은 거래소 내규관리규정 제5조 제2항 제1호에 따라 의견수렴 절차 없이 당일 시행됐다. 해당 규정은 거래소가 규정을 바꿀 때 시장에서 긴급한 경우 사전 의견수렴 절차를 생략할 수 있도록 한 예외 조항이다. 보통 개정안을 미리 공개하고 시장참가자와 이해관계자의 의견을 받은 뒤 개정하는 게 일반적인 절차다.
이는 최근 법원이 한국거래소의 시가총액 미달 상장폐지 제도에 제동을 걸자 발빠른 시행세칙 개정을 통해 대응에 나선 게 아니냐는 시선이 나온다. 앞서 해당 세칙을 변경한 당일 법원이 코스피 상장사
주연테크(044380)와 코스닥 상장사
케이엠제약(225430)이 한국거래소를 상대로 제기한 상장폐지 결정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인용했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시가총액 미달로 관리종목으로 지정된 기업이 90거래일 안에 45거래일 연속으로 시가총액 기준을 넘지 못하면 상장폐지되도록 한 조항을 문제로 들었다. 코스피 기업은 300억원, 코스닥 기업은 200억원이 상장폐지 적용 기준이다. 해당 조항은 원래 오는 2027년 1월 시행 예정이었으나 한국거래소는 이를 반기 단위로 앞당겨 지난 7월부터 시행했다. 이에 따라 재판부는 이 같은 조기 시행으로 인해 기업들이 이의를 신청할 여유가 없었고, 관리종목 기준 상향에 충분한 근거가 제시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다.
다만 이번 시행세칙 개정안에는 법원이 지적한 기준과 관련된 내용이 아닌, 법원 판결·결정에 따라 관리종목 및 상장폐지 효력정지 및 유예를 허용하겠다는 조항만 신설됐다. 상장폐지 기준의 조기 적용이나 기업의 의견진술·이의신청 기회 등 가처분 인용의 배경이 된 쟁점은 별도로 남아 있는 셈이다.
이에 따라 향후 쟁점은 거래소가 법원 판단을 반영해 제도의 적용 시점과 절차를 추가로 보완할지 여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신속한 부실기업 퇴출이라는 정책 목적과 함께, 대상 기업에 충분한 대응 기간과 소명 기회를 보장했는지도 점검할 필요가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IB토마토>에 "법원은 기준 내용이 아닌 제도 적용 시기를 앞당긴 절차상의 문제만 있다고 보고 있다"면서도 "(시가총액 기준 적용 시점 등에 대해선) 추후 제도를 보완할 것으로 알고 있다"이라고 말했다.
상폐 유예에 거래정지 장기화 '우려'
IB 업계에 따르면 현재 상장폐지 가처분 효력정지 미신청 기업들 역시 동일하게 매매거래 정지가 됐다. 한국거래소 소관 부서에선 이번 개정안 적용 대상 기업들을 별도 취합한 후 제도 적용 여부를 재확인하고 있다고 알려진다.
이미 최근에도 상장폐지 위기에 몰린 다수의 기업들이 한국거래소를 상대로 상장폐지 결정 등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걸고 있다. 상장폐지 기준이 상향된 지난 7월 이후 가처분 신청을 제기해 정리매매 등 상장폐지 절차가 보류된 상장 기업은 11곳에 이른다.
한 코스닥 기업 관계자는 <IB토마토>에 "최근 코스닥 기업들의 상장폐지 이의신청이 많은데, 형식적 요건이 아닌 실질적 요건을 고려해서 바로 상장폐지를 시키는 것보다 상장폐지 실질심사로 돌리지 않을까 생각한다"라고 설명했다.
현행 코스닥 기업의 상장폐지 실질심사 시 부여 가능한 최대 개선기간은 1년이다.
일각에선 관리종목 지정 및 상장폐지 유예로 인해 부실기업 퇴출이 지연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상장폐지 절차가 장기간 보류될 경우 재무구조나 영업실적이 개선되지 않은 기업도 시장에 잔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상장폐지 절차가 보류되더라도 매매거래 정지 상태가 이어질 수 있어 투자자 보호 문제도 남는다. 거래정지가 장기화되면 투자자가 보유 주식을 처분하지 못하고, 절차 유예가 기업의 정상화 가능성을 인정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경우 투자자 판단에 혼선을 줄 수 있다.
다만 퇴출 속도를 높이는 것만큼 제도 적용의 정당성과 절차적 권리를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게 업계 공통된 의견이다. 거래소가 유예 대상과 판단 기준을 명확히 제시하고, 법원이 지적한 문제를 보완해야 상장폐지를 둘러싼 갈등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강경훈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IB토마토>에 "부실기업 상장폐지가 오랜 기간 묵혀졌기 때문에 이번 법원의 제동은 제도 시행에 앞서 불가피한 진통으로 봐야 한다"라면서 "거래소가 법원 제동을 통해 기존 제도의 방향을 바꾸는 게 아닌 법원 판결을 보면서 제도의 세부 사항까지 제대로 정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송혜림 기자 diving@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