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자본시장에서 중동 국부펀드의 존재감이 급속히 부상하고 있다. 석유 의존도를 낮추고 미래 산업으로 눈을 돌린 사우디아라비아와 UAE 등 주요 산유국들은 막대한 오일머니를 앞세워 기술·인프라·금융 분야로 투자 영역을 넓히며 시장 판도를 새롭게 그려가고 있다. 과거 단순한 재정 투자자에 머물렀던 이들은 이제 '글로벌 자본의 큰손'으로 자리매김하며 세계 자본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이에 <IB토마토>는 중동 국부펀드의 투자 확대가 국내 사모펀드(PEF)와 벤처캐피탈(VC) 업계에 미치는 영향을 짚고 향후 자본 유입 가능성과 대응 전략을 모색해본다.(편집자주)
[IB토마토 홍준표 기자] 퇴직연금 제도 개편 논의가 본격화하면서 출자 규제 완화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퇴직연금 규모는 약 10년 후 1000조원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규모나 운용 여력 면에서 중동의 국부펀드급으로 진화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평가지만, 수익률은 물가상승률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에 관련 업계에선 퇴직연금의 출자 규제 완화가 국내 산업 생태계에 있어 새로운 자금줄로 거듭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24년 말 기준으로 퇴직연금 적립금의 전체 10년 평균 수익률은 2.31%, 5년 평균 수익률은 2.86%다. 글로벌 경기 불황 및 원자재 가격 상승 등의 영향으로 최근 물가상승률이 ▲2022년 5.1% ▲2023년 3.6% ▲2024년 2.3% 등을 기록하면서 퇴직연금의 수익률은 물가상승률에도 못 미치는 실정이다.
(사진=금융감독원)
물가상승률에도 못 미치는 퇴직연금…사실상 원금 손실
퇴직연금 수익률이 물가상승률에도 못 미치는 주요 원인으로는 퇴직연금에 대한 위험자산 규제가 지목된다. 국부펀드가 국부를 증진하기 위한 목적으로 형성되었다면, 퇴직연금은 근로자들의 안정적인 연금 지급을 위해 운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퇴직연금의 위험자산 투자 한도는 원칙적으로 위험자산 70% 대 안전자산 30% 규제를 적용받고 있다. 금융위원회 퇴직연금 감독규정 제9조에 따르면 퇴직연금사업자는 퇴직연금제도 적립금 중 위험자산 운용비율이 70%를 초과하지 아니하도록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퇴직연금제도 적립금 운용 시 위험자산 편입비율이 70% 이내이더라도, 근로자의 연령, 투자성향, 투자목적 등을 고려해 과도한 위험이 발생하지 않도록 운용하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때문에 퇴직연금사업자는 원리금보장형 상품을 기본 운용옵션으로 제시할 수밖에 없다. 특히 확정급여(DB)형은 운용성과에 따라 근로자 수령액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가 퇴직급여를 확정적으로 지급할 책임을 지고 있어 기업 입장에서도 원금 손실 가능성이 있는 실적배당형 상품을 선택하기 어렵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DB형 퇴직연금의 원리금보장형 비중은 90% 이상이며, 확정기여(DC)형과 개인형퇴직연금(IRP)까지 포함해도 전체 평균 85% 내외를 유지하고 있다.
문제는 수익률이다. 최근 10년간 연환산 수익률은 실적배당형 3.44%, 원리금보장형 2.09%에 불과하다.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사실상 원금 손실인 셈이며, 안정적인 투자가 되려 원리금을 깎아 먹고 있는 구조다. 특히 IRP 계좌를 통한 국내 상장주식 직접 투자도 금지되어 있어, '오천피(코스피 5000) 시대'에 퇴직연금의 수익률은 예금 수준에 불과하다.
중동으로 향하는 한국 유니콘…퇴직연금 투자 확대 '기대'
퇴직연금은 기본적으로 수익성 확대보단 안정성 보장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를 두고 금융당국과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의 충돌도 계속되고 있다. 규제 완화를 통해 수익률을 끌어올려햐 한다는 금융당국과 원금 보호가 최우선이라는 고용노동부 간 견해 차다.
그러나 국민연금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연기금들은 수익률이 최근 두 자릿수를 돌파하고 있다는 점에서 최근 금융당국의 수익성 확대 논의에 힘이 실리고 있다. 실제로 국민연금은 올해 증시 초강세에 힘입어 지난달 말 기준 연간 누적 수익률이 20%를 돌파했다.
국민연금의 20%대 수익률은 글로벌 주요 연기금의 연간 수익률보다 높은 수치다. 글로벌 SWF에 따르면 미국 캘리포니아공무원연금(CalPERS), 캐나다연금투자위원회(CPPIB), 일본공적연금(GPIF) 등 주요 연기금의 최근 10년간 연간 수익률은 6~9% 수준이다. 노르웨이 국부펀드(GPFG)의 경우에도 지난해 수익률은 13.1%다.
특히 국민연금은 국내 주식 수익률이 60%를 넘어선 것으로 집계되면서 퇴직연금 수익성 개선에 대한 요구가 힘을 받고 있다. 금융당국은 앞서 퇴직연금의 위험자산 한도 폐지와 더불어 국내 상장주식 투자 허용도 논의 중이라고 밝힌 바 있다. 지나치게 보수적 운용에서 비롯된 저조한 수익성을 개선하기 위해선 우선 규제부터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관련 업계선 퇴직연금의 투자 규제 완화가 대폭 확대될 경우 중동의 국부펀드 자금에 매달리는 국내 벤처캐피탈(VC) 생태계가 한층 확대될 것으로 기대한다. 앞서 리밸리온, 메디사피엔스, 스페이스워 등 국내 주요 스타트업들은 대규모 투자를 받기 위해 중동으로 향했다. 현행법상 퇴직연금의 벤처 출자는 비상장 주식은 투자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퇴직연금감독규정 9조에 따라 불가능하다.
VC협회 관계자는 <IB토마토>에 “퇴직연금의 벤처 출자는 유니콘 기업으로 평가받는 기업들의 펀딩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한다”라며 “모태펀드를 활용한다면 투자 위험성도 높지 않고 연평균 수익률도 7.5% 수준”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펀딩난에 자금줄을 찾아 해외로 나서는 유니콘 기업들에게 퇴직연금 규모는 새로운 자금 조달처가 될 수 있다”고 전했다.
홍준표 기자 junpyo@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