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행정부가 연방준비제도(Fed·연준)를 향한 금리 인하 압박을 이어가고 있다. 시장에선 연내 세 차례 기준금리 인하 가능성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한국은행 역시 연내 두 차례 금리 인하 전망이 나온다. 이에 자본시장에선 '저금리 회귀'가 새로운 환경으로 떠오르고 있다. <IB토마토>는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채권시장과 자금조달 환경에 어떤 구조적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지 진단하고, 저금리 시대를 이끌 새로운 판세를 조망해보고자 한다.(편집자주)
[IB토마토 최윤석 기자] 저금리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면서 기업들의 장기채 발행 시도가 늘고 있다. 그간 만기 7년 이상의 장기채는 주로 금융사나 통신사의 전유물로 통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조선, 항공 등 업황 변동성이 큰 산업군에서도 장기채 발행에 나서는 분위기다. 금리 하락 환경이 발행 시장의 문턱을 낮추고 있는 셈이다.
저금리 기대감에 장기채 문턱 낮아졌다
19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대한항공(003490)은 3000억원 규모의 회사채 발행을 추진한다. 이번 회사채 발행은 트랜치에 7년물이 포함된 것이 특징이다. 대한항공이 7년물 이상 장기물을 발행하는 것은 2012년 이후 처음이다.
이 같은 결정은 최근 발행시장에서 장기채에 대한 투자 수요가 충분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올해 들어 주요 기업들이 7년 이상 장기채 발행에 잇따라 성공하면서 시장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대표적으로
HD현대(267250)는 지난 7월 100억원 모집 규모의 7년물 회사채 수요예측에서 830억원의 주문을 확보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이에 따라 민평금리 대비 20bp(bp=0.01%) 할인된 3.682%로 금리가 확정됐고, 발행 규모도 400억원으로 증액됐다.
통상 장기채는 안정적인 현금흐름이 보장되는 금융사나 통신사 중심으로 발행돼 왔다. 그러나 이번 HD현대의 발행은 조선업계 최초의 7년 이상 장기물 발행으로 경기 민감 산업에서도 장기채 수요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는 신호를 시장에 던졌다는 평가다.
금리 낮아지자 전략도 바뀐다…'DCM 판도' 변화 조짐
채권 주관 시장 역시 변화하는 발행 환경에 맞춰 전략을 조정하고 있다. 특히 파트너십 구축이나 틈새시장 공략 등 각 증권사 고유의 방식으로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대한항공의 이번 회사채 발행에는 한국투자증권,
삼성증권(016360), 신한투자증권,
키움증권(039490), 한화투자증권, 우리투자증권 등 주요 증권사들이 주관사로 참여했다. 이 중 키움증권은 올해 한진그룹 계열사 회사채 발행에서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주관사로 참여하고 있다.
채권 주관 시장은 상위권 증권사의 실적 쏠림이 심화되는 가운데, 키움증권은 유일하게 지난해 대비 주관 순위를 끌어올리는 데 성공한 증권사다. 2023년 8월까지 키움증권은 삼성증권에 이어 7위를 기록했지만, 올해 4월 이후로는 6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키움증권이 순위역전에 성공한 비결은 한진그룹을 중심으로 한 저신용·고난이도 딜 수임 전략이 자리하고 있다. 실제로 키움증권은 올해 대한항공의 세 번째 회사채 발행에서도 주관사로 이름을 올렸다. 이외에도
두산퓨얼셀(336260), 삼척블루파워 등 비우량 등급 회사채 주관을 연달아 수임하며 실적을 쌓았다.
(사진=키움증권)
키움증권은 한진그룹과 파트너십을 맺어 저신용 채권 시장에 진출했다. 2016년 한진해운 사태로 대한항공 ABS 발행이 업계 전반에서 기피 대상이 됐을 당시 키움증권은 과감하게 2050억원 규모를 단독 인수하며 리스크를 감수했다.
이후 2021년 코로나19 팬데믹 국면에서도 키움증권은 한진그룹 계열사의 2001억원 규모 회사채 발행을 주관했다. 키움증권은 한진그룹과의 장기 파트너십 구축과 성과를 모델 삼아 성장 가능성이 높은 기업과의 관계 구축을 통한 DCM 전략을 펼치고 있다.
(사진=메리츠증권)
메리츠증권은 초대형 IB 진입을 선언하며 기업금융 역량 강화를 위해 채권 주관 시장에서도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특히 최근 금리 하락에 따라 활발해진 금융사 리파이낸싱 수요를 집중 공략 중이다.
올해 2월
NH투자증권(005940), 신한투자증권의 회사채 발행을 대표 주관한 데 이어, 5월에는 KB증권, 7월엔 다시 신한투자증권의 회사채 발행을 주관했다. 9월에는 NH투자증권 딜에도 참여할 예정이다. 이처럼 메리츠증권은 다른 증권사의 리파이낸싱 딜을 연이어 수임하면서 시장 내 후방 확대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올해 초 기업금융본부를 신설하고 산하에 신디케이션, 주식자본시장(ECM), 채권자본시장(DCM) 조직을 체계화하며 IB 전반의 체질 개선에 나섰다. 특히 DCM 조직은 1팀, 2팀으로 이원화해 30여명 규모로 확장됐다.
메리츠증권은 단순 주관 수수료 수익에 그치지 않고, 셀다운이 용이한 금융사 물량을 중심으로 자산회전율 개선 전략도 병행 중이다.
자산회전율은 기업이 보유한 자산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사용해 매출을 창출하는지 나타내는 지표다. 메리츠증권은 DCM을 통한 유통 구조 내재화를 통해 자체 포트폴리오의 안정성과 유동성을 동시에 추구한다는 전략이다.
발행시장은 확대·주관 시장은 고착…돌파구 될까
저금리 환경은 발행시장에선 기회로 작용하고 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 상반기 전체 회사채 발행액은 75조352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5.0% 증가했다. 이 중 순발행 규모는 19조8093억원으로 11조195억원보다 80% 가까이 늘었다. 발행금리 인하에 따른 채권 발행이 늘어난 탓이다.
다만 채권 주관 시장은 여전히 고착화 상태다. <IB토마토> 리그테이블에 따르면 지난 8월까지 KB증권이 1위 자리를 굳건히 유지하고 있으며, NH투자증권, 한국투자증권, 신한투자증권,
SK증권(001510)까지 2~5위도 순위 변동 없이 이어지고 있다.
상위 5개사 중심의 독과점 구도가 고착된 가운데 키움과 메리츠 등 중견사는 각자의 방식으로 새로운 틈새를 파고들고 있다. 이 가운데 일부 기업은 은행 대출보다 저렴한 회사채 조달 비용을 이유로 발행에 나서는 경우도 늘고 있다.
AA-등급을 보유한
빙그레(005180)는 최근 500억원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했다. 공장부지 매입을 위해 기존에는 은행 대출을 이용했으나, 대출금리가 3.83%였던 반면 회사채 금리는 2% 중반대로 낮게 책정되자 발행으로 방향을 틀었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IB토마토>에 “이전 고금리 시기 발행한 단기 부채 상환을 위한 수요와 더불어 조달 구조 안정화를 노리는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라며 "이에 얼마나 그런 기업들의 수요를 파악하고 딜을 발굴하느냐가 관건이 됐다"라고 말했다.
최윤석 기자 cys55@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