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의 확산은 이제 단순한 IT 산업 성장의 차원을 넘어 글로벌 전력 인프라 수요 구조까지 뒤흔들고 있다. 초대형 연산을 기반으로 하는 AI 데이터센터는 기존 산업시설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전력 공급을 요구하며, 송배전망과 변압기 등 중전기 설비 수요를 구조적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번 전력 투자 사이클을 일시적 호황이 아닌 10년 이상 이어질 구조적 슈퍼사이클로 전망한다. 이에 <IB토마토>는 AI가 촉발한 전력 수요 급증이 중전기 산업의 수주 구조와 생산 전략, 재무 체질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살펴보고, 전력 3사가 선점한 성장 기회를 심층 분석하고자 한다.(편집자주)
[IB토마토 권영지 기자] 인공지능(AI) 확산이 글로벌 산업 지형을 바꾸고 있는 가운데 전력 산업이 전통적인 경기순환 국면을 넘어 구조적 호황 구간에 진입했다는 평가가 힘을 얻고 있다. 단순한 설비투자(CAPEDX) 증가가 아니라, 수요 구조 자체가 바뀌면서 전력 인프라 산업 전반이 장기 성장 궤도에 올라섰다는 분석이다. 특히 국내 전력기기 업체들의 수주 잔액이 단기간에 급증하고 있다는 점은 이번 사이클을 ‘슈퍼사이클’로 규정하는 가장 직접적인 근거로 꼽힌다.
(사진=효성중공업, HD현대일렉트릭, LS일렉트릭)
수주 잔액 27조원…2~3년치 일감 쌓였다
3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전력 산업이 맞이한 호황이 주목받는 핵심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국내 전력 3사로 불리는
HD현대일렉트릭(267260)·
효성중공업(298040)·
LS(006260)일렉트릭의 누적 수주 잔액이 2년 만에 90% 이상 늘어났다는 점이다. 올 3분기 기준 이들 3사의 누적 수주 잔액은 약 27조5000억원으로, 2023년 동기 14조8000억원 규모에서 2년 만에 두 배 가까이 확대됐다. 수주 잔액이 단순한 ‘기대치’가 아니라, 이미 계약이 체결된 향후 매출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전력 산업 수요 규모가 과거와 전혀 다른 국면에 진입했음을 보여준다.
둘째는 산업의 구조적 특성이다. 전력기기 산업은 대표적인 주문형 산업이다. 변압기·차단기·GIS·배전반 등 핵심 설비는 프로젝트 수주 후 설계, 제작, 시험, 인증, 선적까지 평균 1~3년의 리드타임(lead time)이 필요하다. 고객 맞춤형 설계와 고압 시험설비와 국가별 인증 절차가 필수적으로 수반되기 때문에 단기간에 생산량을 늘리기도 어렵다. 이 때문에 수주 잔액은 곧 향후 수년간 인식될 매출과 이익이 확보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일정 수준 이상 수주가 쌓이면 경기가 둔화되더라도 수익성 악화 영향이 제한적이다. 이번 사이클에서 전력기기 업체들의 수주 잔액이 빠르게 늘었다는 점은 최소 2~3년치 일감을 이미 확보했다 것을 뜻한다.
이 같은 수주 확대 배경에는 AI 데이터센터가 만든 전력 수요 구조의 변화가 자리하고 있다. 대형언어모델(LLM)을 기반으로 한 AI 학습과 추론 서비스는 기존 데이터센터와 비교해 압도적으로 많은 전력을 소비한다. 특히 미국에서는 AI발 전력 소비량 변화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미국 에너지부에 따르면 미국 내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는 2014년 58TWh에서 2023년 176TWh로 약 3배 늘었고, 2028년에는 최대 580TWh까지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AI 서비스가 확산될수록 데이터센터 한 곳이 요구하는 전력 규모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면서, 이를 뒷받침할 초고압 변압기와 송배전 설비 수요가 동반 확대되는 구조다.
수출 지표에서도 이러한 변화는 뚜렷하게 나타난다. 관세청에 따르면 올해 1~11월 전선·변압기·차단기 등 전력기기 수출은 71억3000만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11.3% 증가했다. 이미 지난해 연간 최대치였던 71억달러를 넘어선 수치다. 품목별로는 전선이 34.9%, 변압기가 32.6%, 접속·차단기가 20.7%를 차지하며 전력 인프라 핵심 장비들의 수출이 고르게 증가했다. 특히 변압기 수출이 두 자릿수 증가세를 기록하며 전체 성장을 주도한 점은 AI 데이터센터와 대규모 전력망 증설 수요가 직접적으로 반영된 결과로 풀이된다.
국가별로는 역시 미국 비중이 전체의 37.2%로 압도적이다. 미국향 전력기기 수출은 전년 대비 30.5% 늘어난 26억5400만달러에 달했다. 이는 엔비디아·구글·메타 등 빅테크 기업들이 대형 AI 데이터센터 투자를 확대하는 동시에, 노후 전력망 교체와 재생에너지 연계 투자가 병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대만 등 신흥국에서는 전선 수요가,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지역에서는 접속·차단기 수요가 늘어나는 등 지역별로도 전력 인프라 투자 확산 흐름이 확인되고 있다.
공급이 따라갈 수 없는 구조적 한계
중요한 점은 공급 측이 이 같은 수요 증가를 단기간에 흡수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초고압 변압기와 송배전 설비는 공장 증설에만 수년이 걸리는 대표적인 공급 제한 산업이다. 설비 증설 과정에서 부지 확보, 인허가, 대형 시험설비 구축이 필수적이고, 숙련 인력과 품질 인증까지 맞춰야 하기 때문에 단기 증설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글로벌 전력기기 업체들 역시 이미 1~2년치 이상의 주문 적체를 안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며, 일부 품목은 리드타임이 24개월 이상으로 늘어났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러한 수요 급증과 공급 제약의 조합은 이번 전력 산업 사이클을 일반적인 경기 호황과 구별 짓는 핵심 요소다. 과거 설비투자 사이클은 경기 둔화 시 주문이 빠르게 위축됐지만, AI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는 디지털 인프라에 기반한 구조적 수요다. 경제성장률과 무관하게 장기간 증가하는 성격을 갖고 있어, 단기 경기 변동으로 꺾이기 어렵다는 평가가 나온다. 여기에 재생에너지 확대, 전기차 보급, 에너지저장장치(ESS) 확산, 노후 전력망 교체까지 동시에 진행되면서 전력 인프라 투자는 ‘일회성 프로젝트’가 아닌 다년간 지속될 구조적 수요로 재편되고 있다.
전력 업계가 맞은 이러한 호황을 자동차·반도체에 이은 차세대 산업 슈퍼사이클의 초기 국면으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수주 잔액 증가로 이미 실적 가시성이 확보된 데다, AI 데이터센터를 중심으로 한 전력 수요 구조 변화가 쉽게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이라는 점에서 전력 산업은 당분간 공급자 우위 시장을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전력 슈퍼사이클이 이제 막 초입에 들어섰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박철완 서정대 교수(전기화학 박사)는 <IB토마토>와의 통화에서 “미국 같은 경우, 산업용 전력 수요가 막 커지고 있는 시기"라며 "향후 10년 이상 국외 수주가 국내 기업에 몰리는 등의 호황이 이어질 전망”이라고 평가했다.
권영지 기자 0zz@etomato.com